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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둘이 떠난 양양, 처음 먹은 회

찢어진 페이지/시골의 추억

by ramson 2026. 10. 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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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던 어느 여름이었다.

정확한 나이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아홉 살 전후였던 것 같다.

금요일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일을 하고 있었고 누나는 중학생이라 학교에 있었다.

그날 갑자기 아버지와 나 둘만 길을 나섰다.

지금 생각하면 별다른 계획도 없었던 여행인데, 이상하게 그날의 몇 장면은 아직도 또렷하다.


1. 목적지는 양양이었다

아버지 차는 프라이드 베타였다.

수동변속기였고, 차 안에는 늘 텐트와 간단한 취사도구 같은 것이 실려 있곤 했다.

지금처럼 숙소를 검색하거나 예약한 것도 아니었다.

지도책을 보고 그냥 동해 쪽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양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 즉흥적인 여행이었다.

앞서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우리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에서 떠올린 것처럼 당시의 여행은 목적지를 찍고 출발하는 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지도책을 보고, 길을 찾아가고, 필요하면 사람에게 묻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2. 바닷가에 텐트를 쳤다

바닷가에 도착하니 이미 여러 텐트가 보였다.

마치 해변 위에 작은 마을이 생긴 것 같았다.

우리도 오래 쓰던 5~6인용쯤 되는 오각형 텐트를 쳤다.

그날 밤 잘 곳이 생기자 여행 준비는 사실상 끝이었다.

숙소 체크인도 없고 열쇠도 없었다.

텐트 하나가 그날의 집이었다.

지금처럼 캠핑장이 잘 정비되고 예약 시스템이 있는 여행과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3. 아버지가 회를 사왔다

아버지는 근처에서 회를 사왔다.

정확히 어느 시장이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하얀 스티로폼 접시에 회가 담겨 있었다.

오징어와 광어, 우럭 같은 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전에도 생선을 먹어본 적은 있었지만 내가 ‘회’라는 음식을 제대로 먹어본 기억은 그때가 처음이다.

앞의 **계곡의 어죽과 바닷가의 물회, 오징어회**에서도 바닷가 음식 이야기를 떠올렸지만, 내 기억 속 첫 회는 이 양양 여행과 가장 강하게 붙어 있다.


4. 초장은 생각보다 강한 맛이었다

회 한 점을 초장에 찍어 먹었다.

처음 먹었을 때는 회의 맛보다 초장의 새콤하고 매콤한 맛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상추에 회를 올리고 싸먹기도 했다.

어른들이 왜 회를 좋아하는지는 잘 몰랐다.

그런데 바닷가 텐트 안에서 아버지와 둘이 먹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특별했다.

그래서 지금도 첫 회를 떠올리면 생선 이름보다 바닷가 텐트가 먼저 생각난다.

음식은 종종 맛보다 장소와 사람을 먼저 기억하게 만든다.


5. 그날 라디오에서는 태풍 이야기가 나왔다

여행을 떠날 때였는지 도착한 뒤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라디오에서 태풍 이야기가 나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람이 점점 세졌다.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텐트 천은 계속 펄럭였고, 바람이 불 때마다 텐트 전체가 흔들렸다.

어린 나에게는 꽤 큰 소리였을 텐데 이상하게 무서웠다는 기억은 강하게 남아 있지 않다.

그때는 상황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잘 몰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6. 흔들리는 텐트 안에서도 저녁은 먹었다

밖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지만 텐트 안에서는 평소 피서처럼 저녁을 먹었다.

회도 먹고, 꽁치통조림을 넣은 김치찌개도 끓였던 기억이 난다.

밖의 날씨와 상관없이 안에서는 밥을 먹었다.

하루 종일 이동하고 놀아서 피곤했는지 나는 비교적 일찍 잠들었던 것 같다.

밖에서는 태풍이 오고 있었지만, 텐트 안의 저녁은 평범한 피서의 한 끼였다.


7. 새벽 두 시쯤 갑자기 조용해졌다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대략 새벽 두 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밤새 텐트를 두드리던 바람과 비가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태풍의 눈이었는지, 단순히 바람이 잠시 잦아든 것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어린 나에게는 오히려 그 갑작스러운 정적이 더 이상했다.

한동안 조용한 밤을 느끼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8. 아침이 되니 해변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아침에는 햇빛이 들어왔다.

밖으로 나가 보니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보였다.

우리 텐트의 폴대는 휘어 있었다.

바깥쪽 덮개, 우리가 당시 ‘후라이’라고 부르던 플라이도 일부 찢어져 있었다.

주변 텐트들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튜브와 캠핑용품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모래가 침구와 짐 사이까지 들어와 있었다.

밤새 바람이 꽤 심했다는 것을 그제야 실감했다.

밤에는 소리로만 느꼈던 태풍의 흔적이 아침이 되자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9. 그런데 내 기억에는 태풍보다 회가 먼저 남았다

지금 생각하면 꽤 위험하고 고생스러운 여행이었을지도 모른다.

태풍이 오던 바닷가에서 텐트를 치고 잤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여행을 떠올리면 무서웠던 밤이 먼저 생각나지 않는다.

아버지와 단둘이 타고 갔던 프라이드 베타,

바닷가에 쳤던 오각형 텐트,

하얀 스티로폼 접시에 담긴 회,

처음 먹어본 초장의 맛이 먼저 떠오른다.

어린아이에게 여행은 사건의 크기보다 그날 처음 경험한 것이 더 오래 남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고 나니 한 가지가 더 남았다.

그 회를 함께 먹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다.

내가 처음 회를 먹었던 기억에는 아직도 바람 부는 양양 바다와 아버지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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